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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아닌 것들로 별일이 됐던 어느 밤 - 민경희

냥작 2020. 3. 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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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아닌 것들로 별일이 됐던 어느 밤

 

 

이태원에 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 그렇게 서점에서 내눈에 들어온 책이라니, 책은 나와 인연이 있나보다. 인스타그램 스타 작가라고 해서 너무 감성적인 글이 아닐까 했는데, 생각보다 차분하고 읽기 좋았다. 나는 민경희 작가를 모르지만 한권으로 작가의 분위기나 성격, 연애와 사랑에 대해 조금 같았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써놓았지만 사실 나도 작가와 공감되는 많았다. 옛연인을 생각하는 부분에서 나도 느껴봤던 감정이라 글이 와닿았다. 특히 '사우다지' 라는 단어를 보며 나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를 돌이켜보면 아팠던 순간이지만 지금 안에 자리잡은 조금의 우울함과 성숙함을 갖게 해준 시간이어서 이젠 시간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않는 나의 시절을 돌아보게 해준 책이었다.

 



- 우리는 물이 끓은 시간을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다르게 생긴 두 개의 물컵 안에는 물에 담겨 녹기를 기다리는 가루들이 성의없이 우두두 쌓여있었다. 들이치는 햇빛에 수증기가 형태를 드러내고 수중기가 점점 커져갈 무렵이면, 집에 있던 모든 것들이 습기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낮은 나에게 그렇게 조용하고 지루한 시선을 안겨주었다



<안녕하지 않아요>
안녕히계시죠?
어떤 말이는 근황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자람이 감겨있다. '안녕히 계시죠'라는 말은 그런 묘한 복합성을 잘 보여주는 인사말이다. 안녕히 계시냐는 말을 들으면, 아직은 안녕히 있을 수가 없은 나여서 그만 옅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슬픔이 조용하게 곁을 지키고 있다. 아주 크지는 않으니 잘게 쪼개어진 슬픔들이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 지금의 내 안녕을 가로 막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던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이건 삶의 공평함인 걸까? 겨우겨우 슬픔을 배우면 그 다음에 기쁨을 알게 되고, 또 겨우겨우 행복을 생각할 수 있게 되면 슬픔이 슬며시 찾아와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쉽게 안녕할 수 있을까.
무책임하게 또 시간을 탓해야 할 지경이다. 시간은 나를 숨겨주니까. 시간이 흘러 나중이라는 그때가 되면 안녕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대의 안녕을 담아 인사를 건내본다. 안녕히계세요(부디)




<틀어진 궤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쩔 수 없다는 말 들으면
어쩔줄 몰라 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변해버린거지.
변하면 후퇴는 할 수 없더라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바람>
단지 겉멋만 들지 않기를
사유하고 사유하기를
나의 행복감을 함부로 자랑하지 말기를
조심하게 다루기를
예를들면
나의감정/상대방의 기분/고양이를
속옷은 항상 좋은걸로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기를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또 펑펑 울었다.
우울함, 그것들을 꺼내어 보기 위하여.
"그게 뭐라고 그토록 어려웠을까"

어떻게든 설명해보려고 하지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려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배설을 해야만 나는 속이 풀린다.
이따금 내 인생에 연민을 느낀다



<기약>
행복을 전시하는 것들은 참 쉽다. 그러나 나또한 언젠가 행복해지겠지, 하는 갈망을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다. 당신들도 그렇지 않을까?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
또 펑펑 울었다. 우울함, 그것들을 꺼내어 보기 위하여. "그게 뭐라고 그토록 어려웠을까?"
어떻게든 설명해보려고 하지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려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배설을 해야만 나는 속이 풀린다.
이따금 내 인생에 연민을 느낀다.




<밤의 소란, 밤의 고요>
그곳은 가난, 헤픈 웃음, 바보 같은 말 따위도 쉽게 용서된다. 어둠이 짙게 깔리면 어김없이 극으로 치닫는 외로움이 있다. 밤의 고요와 밤의 소란 사이에서 잠시고민하ㅏ 소란한 그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비슷비슷한 외로움들이 한데 모이니 어느덧 무수한 마이너스 곱들이 플러스가 되듯, 아량 넓고 넉넉한 마음씨로 바뀌어 있다.
생생한 연기, 왁자한 웃음소리들, 현실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있다는 기분.
살아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에 나는 잠시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순간에 새긴 영원>
기대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불완전한 나를 차분하게 인정하며 그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동안 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며칠 전 그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했던 말들이 나를 슬프게 했다. "기댈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좋은데 이 순간들이 영원할 수 있을까?" 그냥 질문이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슬펐을까.
나는 아직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처지, 내가 지니고 있는 이순간들이 나의 최대의 경험, 각자가 느꼈던 감정들은 설익었을뿐이다. 그것을 "와그작", 하고 힘 있게 먹기에 난 아직 자신이 없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설익은 것들을 보며 성급히 주워 그것을 조언이랍시고 건네주었다.
그것들의 역량이 떨어져 나간다면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끝나는 순간일 수도 있겠지, 이런 결론을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다. 슬픔은 잠시 마음속에 감추어두고 곧 잘 웃으며 말했다.
"음...그렇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순 있어 영워하다 라고!"




'saudade 사우다지'
지금 부재한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향한 아주 깊은 향수, 닿기 힘든 그리움, 그것은 대상일 수도 공간일 수도 관념일 수도 있다.
포르투갈어에만 있는 단어어인데 삶에서 그리운 무언가에 대한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그리움, 향수에 빗댈 수 있지만 실제 브라질 사람들이느끼는 감정의 층위는 한참 다르다고 한다. 한국의 '한'이라는 정서를 다른 언어로 설명하려고 할 떄 느끼는 막연함처럼 풀어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라고.
너무 정이 들어서 내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은 사람이 떠나가기 떄문에 느끼는, 그러니까 내 일부를 떼어내는 것과 같은 아픔이자 동시에 그사람이 다시 자산의 자리로 돌아가서 잘 지내기를 바라는 행복한 마음이 섞인 감정, 이라고 설명을 한다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는지
오롯이 온전했던 시절, 그때 온전하다 느낀 것은 너와 함께 있던 순간들, 그것이었다. 이제와 그때가 다시 오기를 바란다면 그건 이젠 욕심이자 함이 맞을 것이다. 그 시기의 완성은 너와 함께 있는 나였다. 내 일부가 되어버린 너. 그 편안함이 좋았다. 안정된 느낌과 온기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그 사랑에 조금 더 집착을 하게 되었고 더 많은 불평불만을 품게 되었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기기도 했고 나중에서는 양보를 하지 않았다. 지쳐만 갔다. 사람에게 지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 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이미 약해져 있어서, 그에게 온전하게 내 마음을 다 주어서 그가 아니면 안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내가 무언가 거듭 잘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어떤 느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신은 알고 있을까?
포르투갈어에만 있는 그 단어 사우다지를 난 왜 알 것 같을까



<떠나보내는 일>
조금은 성숙해졌다 말할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좋다. 그러나 이따끔 예전의 미성숙한 내가 그리울 때가 있다. 순진했던 무지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기를 기억한다. 모든 자극에 높이 들떴다가 묵직하게 가라앉기도 했던 무질서한 날들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시간을 멀리 건너와보니 그때는 몰랐던 것들은 그토록이나 아름다웠던 것이었음을, 악의가 없던 지난날들. 지나고 나니 큰일들은 대수롭지 않아졌고 정작 대수로운 것들은 알아채지 못한 채 다 지나고 나서야 멋쩍게 돌이키게 된다.
이렇게 또 가을이 지나 겨울이 왔고 구태여 나를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